쉽고도 잘 쓴 글이란 이런 것이다.

출처 :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지음) 138~140p

이 생물의 조직 형태는 생래적으로 피혁처럼 질기고 억센 것이었으며 동반구 무척추 동물의 어느 진화 단계에 해당하는 듯 했으나 우리로서는 도저히 추량할 길이 없었다.
─ H.P. 러브크래프트 <광기의 산맥에서 At the Mountains of Madness>

어떤 화분에서는 무엇을 심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또 어떤 화분에는 갈색으로 시들어버린 줄기가 남아 불가해한 침탈을 증언하고 있었다.
─ T. 코라기선 보일, <싹트는 희망 Budding Prospects>

누군가 노파의 눈가리개를 낚아챘고, 그녀와 사기꾼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 이윽고 일행은 잠자리에 들었는데, 조그맣게 피운 모닥불이 돌풍에 휩싸여 살아있는 동물처럼 포효할 때 그들 네 사람은 괴상한 물건들이 흩어져 있는 불가에 웅크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불꽃들을 지켜보았다. 마치 공허 속의 어떤 소용돌이가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듯 했고, 황무지를 휩쓰는 이 선와(旋渦) 앞에서는 인간의 삶도 이해타산도 모두 부질없어보일 뿐이었다.
─ 코맥 매카시, <피의 자오선 Blood Meridian>


그는 강으로 갔다. 강은 그곳에 있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강 Big Two-Hearted River>

그 아이는 외야석 밑에서 못된 짓을 하다가 그들에게 들켰다.
─ 시어도어 스터전, <당신의 피 Some of Your Blood>

이런 일이 있었다.
─ 더글러스 페어베언 <사격 Shoot>

어떤 주인들은 자기들이 해야 하는 일이 싫었기 때문에 친절했고, 어떤 이들은 잔인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화를 냈고, 또 어떤 이들은 냉정해지지 않으면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오래전에 깨달았기 때문에 냉정했다.
(Some of the owner men were kind because they hated what they had to do, and some of them were angry because they hated to be cruel, and some of them were cold because they had long ago found that one could not be an owner unless one were cold.)
─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

특히 흥미로운 것은 스타인벡의 문장이다. 여기서 사용된 낱말은 모두 50개이다. 그 50개 중에서 39개는 음절이 하나뿐인 낱말들이다. 나머지는 11개인데, 이 숫자조차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스타인벡은 'because'를 세번, 'owner'를 두번, 'hated'를 두번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장 전체에서 음절수가 2개를 넘는 낱말은 단 한개도 없다. 문장 구조는 복문이지만 사용된 낱말은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수준을 넘지 못한다. 물론 <분노의 포도>는 빼어난 소설이다. 나는 <피의 자오선>도 빼어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책에는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꽤 많다. (후략)



...나도 스타인벡이 좋아요. (넙죽)


물론 어려운 단어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너무 그런 단어에 의존하는 것은
기본이 안된 영화를 음악으로 커버하려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지.

말하려는 바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문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우선이 아닐까 싶다.


by 샐리 | 2005/01/26 17:23 | 생각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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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MAGIN at 2005/01/26 18:24
아아...와닿는 글이네요. 책의 번역뿐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기사나 포스팅에서 복잡하고 긴 문장구조에, 한자어가 가득한 문장들을 보면 한숨이 나와요. 너무 '있어보이려'하는 느낌이랄까. 그런 글이 더 멋지다.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믿고있는 것 같아서...언제나 단순하고 깔끔한 문장을 쓰고 싶은데 쓰다보면 저도 모르게 문장이 꼬인답니다..ㅜ_ㅜ
Commented by 모나카 at 2005/01/26 18:26
저도 항상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특히 번역의 경우는 너무 예전의 문어체적인 성격이 강한 단어들이 나오는 경향이 많은 것 같더군요. (헉; 이 문장도 꽤나 문제가 있죠? ^^)
Commented by 파애 at 2005/01/26 20:58
피의 자오선은 두번 읽었는데도 정확히 상황파악이 안되는...ㅡ.,ㅡ
샐리님 트랙백 덕분에 오늘 저희집 미어터지네요...^^
Commented by 바람조각 at 2005/01/27 02:26
저도 좋아요 ;ㅁ; 안그래도 오늘 책추천 포스팅에 올린게 에덴의 동쪽이었는데; 영어원문으로 읽어도 말 자체는 굉장히 쉽지요. 제 생각이지만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가는 톨스토이랄까요. 쉬운 이야기 속에 간결하고 어찌보면 진부한 주제, 하지만 확 와닿는 그런.
Commented by catnip at 2005/01/27 15:12
문장력은 둘째치고 온갖 미사여구와 가능한 말늘임으로 원고지를 채우려고 발악하던 과거의 글쓰기가 문득 생각납니다.
지금은 잘 읽는데 삶의 목적을 두다보니 역시 짧은 이해력으로도 확 와닿는 문장력이 최고인것에 공감합니다.
(문득 몇달간의 침묵끝에 한마디 남겨봅니다.^^;;;)
Commented by 샐리 at 2005/01/27 15:38
AMAGIN / 그렇죠? 글의 내공을 결정짓는 건 쓰인 어휘가 아니라 글 자체가 담고 있는 생각의 깊이일진대 말예요;
...이런 말을 하는 저도 그런데서 자유롭진 못하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싶습니다.

모나카 / 일본어 중역의 폐해인 것 같아요. 일본의 한자어 많은 글을 그대로 옮기다보니 그렇게 되었달까.. 좀 다른 얘긴데, <물은 답을 알고있다>의 한국어판을 굉장히 쉽게 쉽게 읽었거든요. 그러다 우연히 원서를 봤는데, 세상에나 온갖 한자어의 범벅인 거였어요. 아아, 이거 만약 실력없는 번역자에게 들어갔으면 이 어마어마한 한자말이 그대로 쏟아져들어왔겠구나 싶어 아찔하더군요. 그 후로 양억관 씨를 존경하게 됐습니다.

파애 / 끄덕끄덕; 전 읽지 않았지만 저 위의 예시문장만 봐도 읽을 생각이 싹 달아나더군요.

바람조각 / 끄덕끄덕. 같은 주제라도 어떻게 다루느냐가 바로 멋진 글쟁이의 내공인 것이겠죠 ^^

catnip / 글을 늘릴 필요가 있을 때에는 만연체가 유용하죠 ^^;; (반갑습니다~ :D)
Commented by 모나카 at 2005/01/27 16:41
양억관씨 이름은 종종 하루키 번역에서 보고 했지만, 개인적인 선호도에 밀려 많이 보지는 못 한 것 같으네요. 하루키 소설 같은 경우는 꽤 많은 번역자들이 작업을 하기 때문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더 알기 쉬운 것 같아요.
일종의 각인현상 때문인지 제 취향은 김난주씨 번역이지만요. ^^
Commented by Cain at 2005/01/27 19:51
쉽고도 잘 쓴 글이란 정말 어려워요. ;ㅁ; 며칠전에 샐리님 블로그에서 트랙백한 글, 제가 쓰고도 제가 헷갈리는 이상한 글이었습니다. 훌쩍. 그래도 생각을 꺼내놓으면 정리하기 쉽지 않을까 꺼내보기는 했지만;;
딴얘기지만 저 유혹하는 글쓰기 같은 것은 번역하기도 어렵겠어요. ^^
Commented by 샐리 at 2005/01/27 23:40
모나카 / 저도 양억관씨 번역이라고 본 건 저 <물은 답을 알고 있다> 하나뿐이에요. (원래 일본소설은 안 읽어서) 그래도 그 한권의 번역이 마음에 들었어요. 책의 성격에 잘 맞는 쉬운 문장을 썼던 것 같아요. ^^

Cain / 예, 저도 늘 고민하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 그쵸? 저 책 번역자도 잘 하는 분 같았어요. ^^
Commented at 2005/01/28 17:2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5/01/28 18:14
사실은 쉽게 쓰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요즘 여러모로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 혼자 명문이라고 도취되어 있어도 옆에서 보고 '뭔 소리래?'하면 끝장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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