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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라는 말의 쓰임새.

 
예전에 몇몇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정말 미안하면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겠다는 글을 몇개 읽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올라온 여러 글들이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그에 책임을 지는 행동이 수반되지 않고 쉽게 입에서 나오는 미안하다는 말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면피성 어구일 뿐 진정한 사과는 아니라고.
주로 그런 얘기들이 쓰여 있었다.
맞는 말이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면피성 '미안하다'는 오히려 듣는 이의 짜증을 유발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안하다'라는 말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쨌건 미안한 짓을 하지 않았는가?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그럼 미안하다고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미안하다고 말한 뒤에 그 말에 책임을 지느냐 안 지느냐 하는 건, 그 다음의 문제다. 2차적인 문제다.

말보다는 행동이라고, 행동으로 반성하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고도 하지만
그 방법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먼저, 시간이 걸린다.

가령 친한 친구 A,B가 있었다고 치자. A가 평소에는 개념없이 구는 사람이 절대 아닌데 어쩌다 B에게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고 하자. 너무나 미안해서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아서, 그래서 다음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행동으로 미안하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한다고 치자.
헌데 그런 실수를 할 기회가 그렇게 자주 오는가? 자신이 반성했음을 보여줄 기회가 영영 안 오면 어쩔 것인가? 게다가 그런 기회는 영영 안 올수록 좋은 것 아닌가? 이래저래 모순이다.

혹은 그런 엄청난 잘못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게 아니니, 대신 평소에 잘해준다고 치자. 근데 언제까지? 언제까지 눈치를 볼 것인가. 눈치를 보는 모습은 사실 보기 좋은 게 아니다.
게다가 저 사람이 정말 반성하고 있구나- 하고 알 때까지 걸리는 시간동안, B의 속은 과연 평온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사실상 "나 이렇게 미안하니까 니가 알아서 눈치채줘"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그것이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자존심 챙기기라고 생각한다. 정말 미안하면 납작 엎드려서 나의 미안함을 상대가 알 때까지 매달려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이렇게 미안해서 차마 말도 못할 정도로 미안하니 네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중에 말할게- 라. 왜 그 화가 빨리 풀리도록 노력하지 않는가.

나는 아무리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해도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좋다. 사과 한마디로 풀릴 앙금이 아니라 해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잘못을 말로 시인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평가는 하늘과 땅차이다. 그 사람이 '미안하다'는 것을 내게 표출하면, 나는 그 후에는 느긋하게 그 사람이 다시 그럴 때까지 신경을 꺼두어도 된다. 헌데 그 사람이 말을 안 하면, 저놈이 저게 전혀 안 미안하니 앞으로 또 그럴 심산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 늘 신경을 곤두세우며 저놈이 또 그럴건가 안 그럴건가를 계속 감시해야 한다. 그런 피곤한 짓을, 사과받을 당사자에게 시킨단 말인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겠지만, 나의 경우 대개 저런 비겁한 짓을 하는 사람은 나보다 지위가 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존심상 체면상 아랫것에게 말로 사과하진 못하겠고 하니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다시 안 그러면 되겠지, 속으로 반성하면서.
...천만에.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신인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찌 아는가. 당신이 10년 전에 내게 그 일로 미안해하고 반성해서 다신 안 그러겠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나는 그 10년간 당신이 또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고민해야 한다.

말로 하라.

말을 값싸게 만드는 건 그 다음의 당신의 행동이다.
말 자체가 값싼 것은 절대 아니다.





2004년 12월 13일에 썼던 비밀글. 옛글 뒤져보다 나와서 비공개를 풀어놓는다.

by 샐리 | 2006/01/18 00:00 | 생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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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동굴곰 at 2006/01/19 21:09
조금 다른 경우인지 모르지만, 가끔 저를 화나게 한 사람들 중에 "지금은 나 때문에 화가 나 있으니까 내가 사과해봤자 더 화만 낼 거야. 좀 가라앉으면 그때 확실히 사과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더군요. 너무나 비겁하지 않은가요? 자기 때문에 화가 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든' 화를 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웃는 얼굴로 사과를 받아주길 기대한다는 게요. 그런 식으로 행동해놓고 나서, '그때 미안했어'라는 말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건 너무한 어리광이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한 사람의 행동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 정말 공감 가는 이야기라서 적어봤습니다^^
Commented by 캬웅 at 2006/02/07 17:29
친정 막내가 샐리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이유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제 블로그에 가져가도 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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