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 노트 Death Note

말많고 탈많았던 모 만화 데스노트.

사건 이후로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구십년만에 대여점 가서 밀린 만화를 보다가, KATSU!를 찾으러 후르륵 넘기는데 그 만화가 걸려나왔다. 아, 맞아. 여기서 연재했지. 읽어보았다.

인쇄의 질이야 어차피 기대할 게 아니니 넘어가고, 번역은... 뭐, 그냥 만화번역이지 뭐;; 라는 생각. 딱히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 가령 내가 늘 드는 예지만 고스트바둑왕의 대표적 오타(이건 오역도 아니다;) 중 하나인 "저도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라는 구절. 원래의 직역은 "저도 많은 각성을 했습니다"지만 그 번역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나처럼 "저도 새로 많이 배웠습니다" 라든가 "저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라고 도착어(到着語)에서 더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로 바꾸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각성을 했다'라는 걸 택했을 뿐. 단지 그뿐이다. (..며칠 전에 본 거라 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전에 분석(?)해 올렸던 <사랑하는 나의 딸들>보다 안 좋았다.)

그보다도 작품 자체에 대해서, 일단 소재는 흥미로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소재를 끄집어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사실 9.11 사태 이후 이라크 침략을 결정한 부시를 보면서 "누가 저거 암살 안 해주나" 라는 생각, 다들 한번씩 해보지 않았는가? (...안 했나?;;) 나는 해봤다. 늘상 꿈꾸는 망상 중 하나인 "세가지 소원을 말해보라" 코너는 늘 바뀌는데, 그때의 메뉴는 "부시랑 럼스펠드 좀 없애줘~" 였거든. (물론 그 둘이 없어진다고 미국의 정치 구조가 바뀔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안 한다. 하여간 눈앞에서 짜증을 일으키니 좀 꺼져달라는 것이지.)

아니, 그 망상은 가장 어릴 때부터 시작되는 인간 본성의 망상 중 하나다.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원인을 없애고자 하는 지극히 본능적인 욕구에서 말미암은 망상. 어렸을 때 아빠가 이유도 없이 자신을 야단치면 "아빠 미워 죽어~" 라든가, 학교 들어가서 선생이 괜한 트집을 잡아 각목빳다를 치면 "저 XX 죽어버려~" 라든가. 안 해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모든 인류가 경험을 공유하는 가장 근원적인 판타지 - "저 새끼 없어졌으면~~!!"

그래서 나는 이 만화를 보고, "이 소재가 만화가 된 게 정말로 이게 처음인가?" 라는 놀라움마저 품었다. 정말? 정말 처음이야?

따라서, 처음은 무척 흥미로웠다. 스파이더맨이 히트를 친 이유가 주인공에게 관객이 감정이입하기 쉬운 캐릭터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이 만화가 중세 판타지 물이었다면 전혀 흥미롭지 않았을 거다. 이 주인공이 초장부터 독자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했다면 그 이유는 주인공이 현대인이며, 그것도 대다수 독자들이 공유하는 피억압의 상징인 '고삐리'이기 때문이다. (직장인이었다면 또 감흥이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재미있게 읽었는데.......


...채 1권 분량도 끝나기 전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 노선으로 나가는 거지?"

다시 스파이더맨으로 돌아가서. 감독은 1편에서 피터가 힘을 얻은 뒤 그 능력을 사용하며 익히면서 느끼는 놀라움, 기쁨, 힘, 쾌감 혹은 2편에서는 일상생활에서 겪는 수난과 고뇌 등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정성과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럼으로서 관객들은 보다 더 쉽게, 깊게 주인공에게 동화될 수 있었다. 헌데 이 만화는, 그런 과정이 없다. 무미건조하다. 노트 주워서, 실험해봤다. 응당 이런 일을 할 때 느끼는 두려움이 너무나 간략하게 처리되어 버렸다.
간뎅이가 마비된 주인공? 그래서 그 사신조차도 "너같은 놈 처음이다" 라는 말을 하지만, 그 덕분에 독자는 주인공에게 일체감을 느낄 수 없다. 일단 도입부가 너무 짧다. 곧바로 대결구도로 넘어가버리니 주인공이 데스노트를 받아들고 느꼈을 이런저런 감정들은 "아, 그랬구나" 하는 설명으로만 넘어갈 뿐, 도무지 공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기껏 흥분되는 장난감을 얻었는데, 별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혹은 별로 두려워해보지도 못하고 주인공이 하는 행동을 그저 구경할수밖에 없다니. 그리고는 바로 내용은 전세계적으로 벙 뛰더니 - 곧 일본으로 축소되긴 하지만 - 추리물로 장르전환이 되어버리고 만다.

추리물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장르적으로 써먹고 끝내기에는 소재가 아깝지 않은가? 좀더 독자들의 감정이입과 일체감 등을 끌어낼 수 있는 소재 아닌가? 아니, 추리물로 풀어가더라도 이 주인공을 좀더 평범한 고교생으로 만들었다면 그가 허둥대는 과정, 불안해하는 과정 등이 훨씬 더 현실감있게 느껴졌을 텐데. 이 녀석은... -_-;;

그래서 맨 처음에 "오옷, 원판 사볼까~! o o" 라는 생각마저 하며 읽었던 감흥은, 채 1권 분량도 다 채우기전에 "...걍 빌려보지." 라는 생각으로 바뀌고 말았다. 추리소설 애독자라면 또 모르겠지만, 글쎄...

그 점에서 나는 K양의 견해에 동감한다. : "오바타 다케시의 그림이 아니었으면 전혀 문제되지 않았을 걸."

끄덕끄덕.

거기에 덧붙여, "홋타 유미가 없었으면 오바타 다케시의 그림이라고 해서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다.


..........위대하다, 홋타 유미. (결론은 삼천포로군;;)

by 샐리 | 2004/09/21 14:35 | 만화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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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hatsy(하치) at 2004/09/21 14:52
저도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너무 건너뛰고 바로 대결구도로 들어간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질질 끄는것보단 속전속결로 끝내자! 쪽으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점프계열 만화가 워낙 질질 끌어서...차라리 후딱후딱 치워버리는게 낫지...하면서요 ^^;;
Commented at 2004/09/21 16:4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4/09/21 16:5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xmaskid at 2004/09/21 22:50
저도 처음에는 "오오, 재미있는 소재로군" 하면서 보다가 1권 끝날때쯤에 기분이 그냥 나빠져서 그 다음권을 안사고 있답니다. 주인공이 너무 뻔뻔스럽게 난 잘난놈이야~ 이러니까 좀 부담스럽더라구요.
Commented by 샐리 at 2004/09/22 00:47
하치 / 음... 전 이 경우엔 늘어지는게 문제가 아니라 꼭 해야할 얘기를 빼먹은 느낌이 들어서요 ^^;;

xmaskid / 끄덕. 주인공에 공감이 전혀 안 가더라고요;;
Commented by 왕자 at 2004/09/22 11:30
아니, 그림은 나쁘지 않은데... 정말 안 끌리지 않아? 응? 응?
Commented at 2004/09/22 15:2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4/09/22 15:2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샐리 at 2004/09/23 10:06
위스테리아 / 공개글로 다셔도 됩니다. 원래 블로그라는 게 가장 최신 글에 덧글이 달리는 거니까요. ^^

너무너무 축하드립니다. >ㅁ< 저도 드디어 파우더생식 얼려놓은 게 다 떨어져서 말만 하던 천연생식을 시작하려고 해요. 응원해주세요~

그리고 아래의 801책 출처는 요청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평소 출처 없이 돌아다니는 글에 별 신경 안 쓰고 사는 평범한 사람인데 그 글은 지인의 글이다보니 좀 신경이 쓰여서요. 이래저래 감사합니다. :)
Commented by 내츄롤 at 2004/11/29 13:29
이 잡지 만화 구도가 후반엔 영 아니게 끝난다고 하던데..심히 걱정되더라구요. 저도 남친이 정말 괜찮다며 저 책살때 같이 사던데 한번 봤지요. 확실히..20세기 소년과 같은 공감대 혹은 현실도피적인 무서움,...등은 잘 모르겠더라구요. 크흣. 20세기 소년 17권은 언제 나오려나..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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