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마새 팬픽] 만약 그 때 죽은 것이 락토가 아니라 스카리였더라면

<피를 마시는 새 팬픽>




만약 그 때 죽은 것이 락토가 아니라 스카리였더라면







  말을 달리는 헤어릿의 입에서 하얗게 입김이 보였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풍림조차 제대로 조성될 수 없는 추운 땅에 널브러진 거석들은 스산함만을 더해줄 뿐이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바싹 마른 흙먼지만을 일으키는 곳. 제국 극북의 땅 발케네에는 겨울이 그 어느 곳보다도 일찍 찾아온다.
  척박한 땅만큼이나 메마르고 난폭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이름난 발케네였지만, 이번 겨울은 그래도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발케네 땅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민감하지 않은 사람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묘하게 들뜨고 묘하게 비밀스러운, 어둠에서 어둠으로 키득이며 두런거리는, 그런 공기가 발케네를 살며시 휘감고 있었다. 헤어릿을 뒤따라오는 사람은 바로 그 분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 중 한 명이었다. 그녀를 돌아보며 헤어릿은 말을 멈췄다.
  “워, 워. 아실, 너도 멈춰.”
  “워, 워.”
  아실은 부드럽게 말을 멈췄다. 헤어릿은 감탄했다.
  “이젠 내가 가르칠 게 없구나.”
  “스승이 훌륭했던 탓이죠.”
  즐거운 목소리로 아실도 대답했다. 확실히 그녀의 승마술은 불과 몇 달 사이에 괄목할 만한 성취를 보였다. 평소 3미터 높이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다닌 보람이 있었던 것이리라.
  “그런데 이유가 뭐야?”
  헤어릿은 아실 옆으로 말을 천천히 걷게 하며 물었다. 실은 아까 갑자기 아실이 와서는 ‘같이 좀 달리자’고 했었던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그 부탁에 헤어릿이 이유를 묻자 아실은 가서 말하겠다고 대답했었다. 이제 헤어릿은 유보되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고, 아실이 대답할 차례였다.
  그녀의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당분간 못 탈 것 같아서요.”
  “응?”
  헤어릿의 반문에 아실은 담담한, 그러나 어딘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저, 임신한 거 같아요.”
  헤어릿은 순간 말 등에서 떨어질 뻔 했다.
  아니, 정정하자.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들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 뿐. 그리고, 실은 듣고 싶지 않았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일반적으로 발케네 남자들은 도둑놈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그 땅의 지배자 발케네공 락토 빌파는 당연히 최고의 도둑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이건 심했다. 심했단 말이다.
  암살성에 새 안주인이 들어섰다.
  발케네공 락토 빌파가 염치도 없이 딸보다도 열 살은 더 어린 첩실을 맞아들인 것은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었다.


◀◀ 2 months ago

  “아들이 필요해.”
  삭막한 합리주의자의 청혼은 과연 남다르다 할 것이다. 저것도 청혼이라고 할 수 있다면.
  수프를 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뒤 락토는 아실을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일체의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메마르고 여상한 어조였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락토가 돌아온 뒤에도 황금열쇠를 맡아 가지고 있었던 아실은 헤어릿과 주보와 함께 락토와 같은 식탁에서 아침을 들고 있었다. 수프를 먹던 헤어릿과 새로 날라져 온 닭요리를 막 옮겨들던 주보는 그 자리에서 정지 자세를 연출했다. 헤어릿은 다급하게 주보를 쳐다보았지만 마주보는 주보의 얼굴에서 그도 아는 게 없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락토와 아실을 번갈아 보았지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자기 앞의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아들? 갑자기 웬 아들? 누구의 아들? 설마 락토의 아들? 그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왜 그말을 아실을 바라보며 하는 거지?
  ……설마.
  경악에 찬 시선으로 헤어릿과 주보는 아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실은 입가의 수프를 냅킨으로 닦으며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그거예요?”
  마치 예전에도 이미 이런 얘기가 오갔었다는 말투였다. 헤어릿과 주보의 머리 속은 과부하로 검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심해요.”
  “나는 공평하다고 보는데.”
  어딘지 빙글거리는 락토의 말에 아실은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락토는 말을 이었다.
  “서로의 필요를 교환하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나?”
  “그렇죠.”
  아실은 좀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은 멈춰 있었다. 헤어릿과 주보는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그들은 잔뜩 긴장해서 아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좋아요.”
  시무룩한 어조로 아실은 대답했다. 락토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완전히 얼이 빠져버린 가엾은 헤어릿과 주보를 내버려둔 채, 두 사람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식사를 속개했다. 그리고 식기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를 배경 삼아 여느 때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실, 아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빠져나오자마자, 헤어릿은 다급하게 아실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체 무슨 얘기야, 그게?”
  “뭐가요?”
  “그, 그, 그거 말야. 그 아…들 어쩌고 하는…. 무슨 얘기야, 그게? …설마….”
  급한 마음에 말을 꺼내긴 했는데 차마 직접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헤어릿은 말끝을 흐렸다. 만약 넘겨짚은 거라면 그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짐작이 맞는다면…
  “짐작하는 대로예요.”
  아실은 무정하게도 헤어릿의 도피를 뭉개버렸다. 헤어릿은 비명처럼 새된 소리를 질렀다.
  “설마, 정말로 너보고 애를 낳아달라는 얘기였어?”
  “언성 좀 낮춰요.”
  아실이 눈살을 찌푸리자 헤어릿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헤어릿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잠깐 잠깐, 그럼 이런 얘기가 전에도 있었던 거야?”
  “아뇨.”
  “그럼 오늘 처음 나온 얘기였어?”
  “네.”
  “그런데 넌 그렇게 태연했단 말이야?”
  헤어릿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면서 윽박의 형태를 띄어갔다. 어느 새 헤어릿의 양손이 아실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그야….”
  아실은 어깨를 으슥하며 자연스럽게 헤어릿의 손을 털어냈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니까요.”
  헤어릿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눈을 감았다.
  “미쳤어! 노인네가 노망났나… 넌 그걸 또 승낙한 거고? 알고 있니? 저 사람은 네 나이의 세 배가 넘어!”
  “알아요.”
  “그런데 왜!”
  거의 잡아먹을 듯이 눈을 부라리는 헤어릿을 보며 아실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진정해요, 헤어릿. 애 낳는 건 나지 당신이 아니에요.”
  “누가…!”
  아실의 담담한 태도를 보며 헤어릿은 간신히 격앙된 숨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당황스러운 거다.
  “하지만 대체 무슨 얘기야. 갑자기 웬 아들? 왜 하필 너고?”
  “그건….”
  아실의 얼굴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말을 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아실은 헤어릿이 락토의 친딸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아실은 판단했다.
  “스카리가 죽었으니까.”
  헤어릿의 얼굴이 굳었다. 그 일은 암살성 내에서 금기였다. 아실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모두가 합세해서 묻어두었던 비극을 끄집어냈다.
  “물론 당신에게 강한 신랑을 붙여줘서 데릴사위를 삼는 방법도 있겠죠. 현재로서 유일한 후계자가 당신인 이상 당신의 나이는 문제되지 않아요. 하지만 공작님은 10년간 당신을 기다려왔어요. 이제 와서 당신을 팔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굳어 있는 헤어릿을 보며 아실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날 이후 조금은 나아졌다고 해도 이들 부녀의 관계는 아직도 냉랭했고, 여전히 일방적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죠. 그는 아직 육체적으로 젊고 건강해요. 새 후계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너지?”
  헤어릿이 물었다. 혼란과 경악으로 딱딱한 말투가 튀어나와버렸지만 그것은 아실의 자격을 따진다기보다도 순수한 의문을 표시한 것에 가까웠다. 무려 공작가의 후계자다. 정말로 락토가 후계자를 생각하여 새 여자를 맞이하려는 것이라면, 그런 자리에 근본도 없는 평민 여자를 앉히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이었다. 설령 첩실이라도 말이다. 그 여성이 대재난의 영웅이라 할지라도 귀족 사회라는 것은 한 인물의 일탈적 위업에 기득권의 한켠을 쉬이 내어주는 집단이 아니며 락토 빌파 또한 그런 것을 계산하지 않을 인물이 아니다. 헤어릿의 의문은 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실은 새삼 락토를 동정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 서투른 그 남자는 가족과의 의사소통에도 이렇듯 통역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락토가 아실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실은 아까 한 말을 다시 반복했다.
  “스카리가 죽었으니까.”
  당연하지만 헤어릿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실은 걸음을 멈추고 헤어릿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헤어릿은 움찔했다.
  “그가 왜 죽었죠?”
  “뭐?”
  “스카리가 왜 죽었죠?”
  “그건….”
  그날 락토를 살해하려고 도깨비 감투를 쓰고 노대에 올랐던 스카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되레 자신의 단검을 아버지의 손에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노대에서 밀려 추락사했다.
  비속살해당한 아들의 박살난 머리에서 흘러나온 핏자국은 지금도 노대 아래 화강암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락토는 그것을 굳이 지우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피도 눈물도 없다는 암살공의 평판을 공고히 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실이 말하려는 것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였다.
  “스카리가 공작님의 마음에 안 찼기 때문이에요.”
  아실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스카리에게도 많은 장점이 있었겠죠. 사랑과 낭만에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호방한 성격은 분명 매력적인 기질이에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공작님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어요. 공작님도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스카리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죠. 그 경우 아버지는 아들을 경멸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적개심을 품는 건 흔한 일이에요. 하물며 공작님은 자신의 경멸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둘의 사이는 악화일로를 걸었죠. 그 날의 일은 당연한 귀결에 불과해요.”
  헤어릿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실은 락토에 대한 동정을 철회했다. 모든 것은 자식에게조차 조건 없는 애정을 쏟을 줄 모르는 락토 본인이 빚어낸 비극일 뿐이다.
  “그래서 공작님은, 입맛에 맞는 아들을 새로 만들어내기로 하신 거죠.”
  헤어릿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왜 아실인가에 대한 대답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아실이 왜 그 조건을 받아들였는지 또한.
  이미 처용 산맥 너머에서는 지멘이 발케네의 지원을 받아 레콘들을 이끌고 아실이 꿈꾸던 레콘 독립국 건설의 첫 삽을 뜨고 있었다.



▶▶ At present

  “우웩.”
  아실은 풀밭에 엎어져서 속에 든 것을 게웠다. 먹은 것이 없어서 노란 위액만 나왔다. 산책의 끝 무렵에 갑자기 찾아온 헛구역질로 인해 아실은 급하게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야 했다. 뒤따라 내린 헤어릿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니?”
  “괜찮아 보여요?”
  팩 쏘아붙이는 아실의 말에 머쓱해진 헤어릿이 뻗었던 손을 움츠렸다. 아실은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변태 색마 영감탱이, 다 늙어서 힘도 좋지. 정말 더럽게도 밝혀요.”
  속사포처럼 쏘아져 나오는 노골적인 단어의 폭포에 헤어릿은 그만 얼어붙어버렸다. 헤어릿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아실은 혼자서 계속 중얼중얼하더니 헤어릿에게 말했다.
  “젠장, 아무래도 손해 보는 장사야. 헤어릿, 먼저 들어갈래요? 전 좀 있다 갈게요.”
  “으, 으응? 응?”
  “거의 다 왔으니까 좀 쉬었다가 걸어서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말 탔다간 또 토할 것 같아요.”
  “어, 으응, 그, 그래.”
  당황한 헤어릿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정말 괜찮겠니?”
  “괜찮아요. 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
  그제야 정신을 수습한 헤어릿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와라.”
  “네에-.”
  주춤거리며 헤어릿이 물러가자, 아실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늦가을의 발케네의 하늘은 높고, 파랗고, 아주 약간 높새 구름이 보였다.
  “날씨 좋-다.”
  아실은 몸에서 힘을 빼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혼자서 갖는 이런 시간은 오랜만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락토는 약속대로 레콘 독립국 건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실의 숙원이자 인생의 목표였고, 그것을 들어준 락토는 아실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할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락토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한 가지였다.
  똑똑한 아들, 이번에야말로.
  아실은 거기까지는 쉽게 추론할 수는 있었지만 그 요구가 자신에게 향할 확률은, 고려를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다지 높게 잡지는 않았었다. 헤어릿도 지적한 대로 자신은 공작가의 후계자를 낳을 지위의 여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정말로 그 요구가 자신에게 내밀어졌을 때, 아실은 속으로 적이 놀랐었다. 이 공작 각하를 자신이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발케네의 지배자로 기록될 이 남자는 빌어먹을 만큼 합리적이다. 그 철두철미한 합리성으로 락토는 아실의 허를 찔렀다.
  하지만 또, 그렇게까지 놀라진 않은 걸 보면 자신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아실은 생각했다. 기대한 건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호기심이랄까. 저 공작이 정말로 할 건지 안 할 건지 두근거리며 구경하는 심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저쪽도 아마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아실은 피식 웃었다. 그런 면에서 락토와 자신은 잘 맞는 상대라고도 할 수 있었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대화 상대란 아실의 수준에서도 락토의 수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락토와의 대화는 분명 즐거웠다.
  …육체 쪽의 대화도.
  희끗희끗한 반백, 전형적인 중늙은이의 얼굴과 달리 락토의 몸 쪽은 30대, 아니 20대 후반의 그것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탄탄했다. 그 나이 때까지 비각술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부지런함 덕분이겠지만, 배에 새겨진 뚜렷한 왕(王)자며 힘주어 누르지 않으면 눌리지도 않는 단단한 근육 뭉치들은, 얼굴만 가리면 아무도 그가 50대라는 것을 믿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뭐니뭐니해도 아실은 처녀였고 - 그녀가 인간 사회에서 섞여 살았던 마지막 나이는 12살이었고, 그 후 같이 다닌 상대는 레콘이었다. - 락토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지위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는 세상의 토대가 될 사람 - 바보 - 에게는 정말로 가차 없었다. 진지한 경멸조차 귀한 자원이라고 여기는 락토의 성격으로 비추어 볼 때 그가 보통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녀들을 배려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는 요구해오지 않은 것은 고려해주지 않는다. 뻔히 알고 있더라도. 내숭은 락토에게는 결코 미덕이 아니다.
  그래서 아실은 고통을 줄이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 처녀였다니까. - 락토에게 끊임없이 지시하고 부탁하고 요구해야 했다. 그래도 처음엔 의견 조율이 꽤나 힘들었다. 락토도 잠자리에서 이렇게 나오는 여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느 간 큰 여자가 락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발케네공이라는 지위가 아니어도 락토는 그 자체로 꽤나 버거운 남자다.
  다행히 그는 합리주의자였다. 물론 마음에 드는 상대에 한해서겠지만,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타당한 지적은 수용할 줄 아는 남자였다. 이제쯤에는 아실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밤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횟수랄까.
  스카리의 경쟁자를 만들지 않기 위한 락토의 조심은 병적인 수준이었다. 그 흔한 사생아조차 헤어릿 한 명밖에 만들지 않았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설마 하인샤의 중들 같은 생활을 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저 단련된 육체를 끓어오르는 대로 마음껏 써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못했던 게 확실하다. 안 그러고서야 어떻게 발정난 10대 소년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껄떡거릴 수가 있을까. 그 나이에! 기회는 이 때다, 봄날이 왔다는 등의 문구는 바로 지금의 락토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참으로 빠르게도 뱃속에 뭐가 들어앉아 버렸다.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참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신? 정말? 내가? 벌써?
  …락토의 아이?
  마음은 머리를 따라가지 못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성으로 납득해도 자꾸만 도피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 날씨 좋-다.”
  지금 같은.
  사실은, ‘다가오지 말아요.’라든가 ‘왜 왔어요?’라고 했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결국 아실은 현실로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감투 벗어요.”
  “알았나?”
  허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발소리 냈잖아요.”
  “그건 아닌데, 생각에 잠겨서 못 들을 줄 알았지.”
  “헤어릿?”
  “여기 있다고 말해주더군.”
  풀이 밟히는 희미한 소리가 아실의 바로 옆까지 와서 멈췄다. 팔베개를 한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돌려보았지만 풀잎과 나무, 하늘, 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곧 왼쪽 옆자리의 풀들이 둥그렇게 누웠지만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임신했다고?”
  목소리는 허공에서 들려왔다. 아실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흘낏 눈길을 주고는 여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런 것 같아요. 이거, 물어봤는데 아무래도 입덧 같다더군요.”
  “그런가.”
  즐거워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아실은 눈을 흘겼다.
  “딸일 수도 있어요.”
  “또 낳으면 되지.”
  “난 씨돼지가 아니에요.”
  “섭섭한데. 내가 널 그렇게 취급하던가?”
  “아들 나올 때까지 줄줄이 낳으라면 그런 취급이 되죠.”
  “터울을 두면 되지.”
  바스락. 아실의 오른쪽 옆에 손바닥만한 넓이의 풀들이 눌렸다.
  “몇 년을 붙어 있으라는 거예요?”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난 계약만 이행해 주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바스락. 왼쪽에 사람이 앉은 자리만큼 눌렸던 풀들이 일어서면서 새로 오른쪽과 같이 손바닥만 하게 눌린 곳이 생겼다.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었다. 락토가 그녀의 몸 위로 팔을 버티고 엎드려 있었다. 아실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얘긴, 아들이어도 똑똑한 게 판명될 때까지 여기 있으라는 건가요?”
  “세상의 토대는 계약 사항이 아니지.”
  아무래도 즐기고 있다, 이 남자. 아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래서 이 계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니까.
  “계약 위반이에요, 공작님. 그러면 저는 제 숙원을 돌볼 수 없게 되어 버려요.”
  어차피 레콘들의 나라에서 인간인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식의 논법은 락토는 쓰지 않았다.
  “지금의 방식은 마음에 안 드나?”
  공작인 락토는 당연히 전용 딱정벌레를 두고 있다. 아실은 원하면 언제든지 딱정벌레를 타고 양쪽을 오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인 그녀가 살기에는 당연히 발케네가 더 낫다. 서서히 숙여오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아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점은 감사히 여기고 있어요, 공작님.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저는 부외자가 되어버려요. 그 나라는 타이모의 나라예요.”
  “네 나라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참 정 떨어지는 남자다. 하지만 아실도 반격할 말은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요. 제 나라에 제가 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죠?”
  “대호왕은 북부에 살지 않아.”
  “그녀는 자의로 나라를 떠났어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고요.”
  몸을 눌러오는 직접적인 무게가 느껴졌다. 여전히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아실은 참지 못하고 짜증을 부렸다.
  “감투 좀 벗으면 안 돼요?”
  “재미있지 않나?”
  불시에 목덜미를 스치는 입술의 감촉을 느끼고 아실은 몸을 떨었다.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속살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마다 더운 입김이 작게 와 닿는다.
  “재미없는데요.”
  “너무하는군.”
  쿡쿡 웃으며 락토는 아실의 목에 완전히 입술을 눌렀다. 따뜻한 체온과 감촉과 무게가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아실의 눈에 보이는 것은 파란 하늘과 나뭇가지들뿐이었다. 아실은 어쩔까 하다가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몸 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등을 향해 팔을 둘러보았다.
  팔은 허공에 걸렸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몸을 누르는 묵직한 중량감과 높은 열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도 자신의 팔이 고스란히 보인다는 것은. 아실의 두 팔은 하늘을 배경으로 둥실 떠 있는 듯 했다. 본인에게만 보이고 타인에게는 허상인 환상계단과는 반대로, 도깨비감투는 누구에게나 느껴지지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실체를 만들어낸다. 문득 자신이 딛고 선 단단한 계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뚫고 올라오던 딱정벌레와 갑충사의 기억이 떠올라 아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절대로 추억이라며 웃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추운가?”
  “아뇨.”
  아실은 보이지 않는 허공을 세게 움켜잡았다. 단단한 등이 잡혔다. 손바닥을 통해 더운 체열이 느껴진다. 아실은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시야를 차단하면 지금 자신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덩어리가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입맞춤에 응하면서 아실은 몸속 어딘가에서 파칫거리는 작은 불꽃을 느꼈다. 투명인간 놀이가 아주 재미없진 않구나 하고 아실은 생각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다만 락토가 너무 즐거워한다는 건 문제였다.
  “아, 아파욧!”
  색다른 놀이에 흥분했는지 평소보다 성급하게 밀고 들어오려는 락토를 아실은 눈살을 찌푸리며 제지했다. 대충 손을 뻗어 탁 쳐내니 어깨로 추정되는 곳에 맞았다. 락토가 몸을 띄우는 것이 느껴졌다.
  “빨랐나?”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높새구름만이 둥실 떠 있을 뿐이었다. 아실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만져보면 알 거 아녜요.”
  한 줄기 스산한 바람이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넌 정말 수줍음이란 게 없구나.”
  아실의 목 부근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어딘지 아연한 어조를 띄고 있었다. 아실은 비웃어 주었다.
  “챙겨드려요?”
  “아니.”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사이에서 내숭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이내 보이지 않는 뭔가가 꾸물럭 꾸물럭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실은 작게 한숨을 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하는 거예요!”
  “만져보라며.”
  그야 그랬지만, 예기치 않은 충격 속에서 아실의 비명은 그녀 안에서만 울려 퍼졌다. 그런 걸로 만지란 게 아니었어! 확인을 끝낸 락토가 바로 그 자리에서 중얼거렸다.
  “확실히 성급했었군.”
  그런 데서 입술 달싹거리지 마! 공황에 가까운 혼란에 빠져 아실은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무릎을 세운 자신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것은 풀과 나무, 저 멀리에 있는 산등성이뿐이었다. 물컹한 살덩어리가 뜨겁게 질척거리며 가장 은밀한 곳을 훑어 올리는 그 감각의 근원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런 공포에 빠져 아실은 비명을 질렀다.
  “감투를 벗어요!”
  “…아실?”
  느닷없는 비명에 놀란 락토가 고개를 들었다. 아실은 계속해서 소리를 터뜨렸다.
  “벗으라고요!”
  공황의 기색이 역력한 비명에 락토는 서둘러 감투를 벗어들었다. 두 달간 질리도록 보아온 단단한 근육질의 육체가 갑작스럽게 허공으로부터 튀어나왔다. 소리를 지르던 아실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아실?”
  아실은 빳빳하게 굳어서 숨을 멈추고 있었다. 다급해진 것은 락토였다. 락토는 아실의 뺨을 짧게 여러 번 쳐올렸다.
  “아실, 괜찮아? 아실. 아실!”
  그 때, 아실의 성한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막혔던 봇물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것처럼 아실은 숨을 몰아쉬었다.
  “하악! 학, 학….”
  “괜찮은 거냐?”
  “학…, 예, 괘, 괜찮아요….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실의 얼굴에 조금씩 핏기가 살아났다. 그에 따라 락토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돌아왔다. 락토는 아실의 얼굴을 바싹 끌어당기고 손바닥으로 등을 쓸어내렸다. 천천히 어루만지고 조심스럽게 토닥거렸다. 아실의 숨소리가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됐어요.”
  뺨에 와 닿는 온기에 실체가 있었다. 일조량이 부족한 극북의 남자답게 구릿빛으로 그을리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흰 피부라도 단련된 근육 아래에는 강인한 힘이 약동하고 있었다.
  익숙한 가슴이다.
  아실은 힘을 빼고 눈앞에 보이는 락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감투… 쓰지 말아요.”
  “그러지.”
  락토는 끄덕였다. 아실은 긴 숨을 내쉬며 완전히 몸을 락토에게 내맡겼다. 락토는 아실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살과 살이 어르며 맞닿아 내리는 감촉에는 온화함과, 그리고 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아실이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 팔에 잡히는 자그마한 몸을 그러안으며 락토는 한 손으로 계속해서 아실을 달래듯이 쓰다듬었다. 오후의 햇살을 담은 미풍이 반짝이며 수풀 속을 흘러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실이었다.
  “질기군요.”
  “응? 아아.”
  락토의 무르팍에 앉은 아실의 허벅지에는 아까부터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 줄 모르고 아실이 자세를 고쳐 앉을 때마다 오히려 기세를 더하는 몰염치한 놈이었다. 락토는 쓰게 웃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괜찮아요.”
  아실은 시선을 내려 문제의 그 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평소라면 부끄러워 잘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눈에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녀석은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아실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감촉에 놀란 락토가 아실을 쳐다보았다.
  “아실?”
  “계속하죠.”
  락토의 표정이 갈피를 못 잡고 기묘하게 굳어졌다. 아실은 확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요.”
  잠시 허공에서 수만 가지의 눈빛이 교차되었다. 다음 순간, 락토는 아실을 으스러뜨릴 듯이 끌어안고 그 입술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이번에 락토가 찾아들었을 때, 아실이 느낀 것은 아픔이 아니었다.



  “좋았나?”
  같은 말을 해도 ‘괜찮으냐.’고 물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실은 헐떡이며 쏘아붙였다.
  “칭찬받고 싶어요?”
  허리가 얼얼하니 감각이 없었다. 망할 영감탱이, 대체 얼마를 괴롭힌 거야. 락토는 입가를 살짝 올렸다.
  “실은 그래.”
  “어휴.”
  아실은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락토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처음의 락토는 확실히 투철한 봉사 정신을 발휘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처음 건 백점, 중간은 오십 점, 나중 건 빵점.”
  뒤로 갈수록 이성을 잃더니, 막판에는 힘들다는 아실의 말에 전혀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네 체력이 빵점인 거지.”
  락토는 실망한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돌아가면 너도 비각술 교사를 붙여주마.”
  “사양하겠어요.”
  “해야 할 걸.”
  많은 의미가 함축된 협박에 아실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체력을 키운다 한들 저 괴물 노친네에게 완전히 맞추는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아실도 협박으로 맞받았다.
  “애는요?”
  “…아.”
  거기에는 락토도 과연 할 말을 잃었다. 아실은 히죽 웃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허리뿐만 아니라 팔도 후들거려서, 간신히 앉고 나니 일어설 힘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아실은 다시 한 번 속으로 혀를 찼다.
  그 때, 아실의 몸이 번쩍 들렸다. 아실은 잠깐 놀랐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몸의 힘을 뺐다.
  “업힐까요?”
  “괜찮다. 계단이 아니니까.”
  락토는 모포로 아실의 몸을 둘둘 말았다. 그녀의 옷은 이미 모포를 넣어온 주머니 속에 챙겨두었다. 아실을 가슴에 안고 락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타박, 타박. 일정하게 흔들거리는 율동감은 그녀에게 익숙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지멘은 잘 있을까.
  노곤한 머리로 아실은 생각했다. 락토와의 계약에 묶여 처용 산맥 너머의 일은 지멘에게 거의 일임한 상태였다. 준람을 비롯해서 토목기술을 가진 레콘들도 다수 합세하여 일은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는 모양이지만, 자신이 없는데도 일이 순조롭기만 한 것도 솔직히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부외자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아실은 조금 암울해졌다.
  락토와의 계약도, 사실 말처럼 간단한 건 아니었다. 아들이 태어나더라도 정말로 그 애를 내버리고 떠날 수 있을까. 그 애를 데려갈 수는 없으므로 아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거취뿐이다. 설령 데려갈 수 있더라도 레콘 사이에서 자란 자신이 인간 아기를 잘 기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어머니라.
  자신에게 있어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존재는 타이모일 것이지만, 그 이전에 자신이 버려져 고아가 되었기에 타이모를 만난 것이었다. 타이모를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었지만 그렇다고 고아인 자신이 다행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어머니란 그녀가 한번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존재였다. 엄마 없는 아이를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또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실은 졸려서 무거워진 머리를 힘겹게 흔들었다. 월권하지 말자. 어차피 그 판단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락토가 애만 놓고 나가라면 기꺼이 나가줘야 하는 것이 자신의 처지다. 아실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흔들리는 요람처럼 락토의 팔은 편안했다. 아실은 몇 번 고롱거리더니 이내 잠들어 버렸다.


  가슴팍에서 울리는 고른 숨소리에 락토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실이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고생에 찌들어 비쩍 마르고 볼품없는 계집애였는데, 지금은 잘 먹고 잘 쉬어서 그런지 제법 살도 오르고 태도 고와졌다. 뭐든 잘 먹이고 볼 일이라고 락토는 엉뚱한 데에서 감탄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실이 갑자기 미녀로 표변했다던가 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헤어릿이 있는 이상 웬만한 미모로는 명함도 내밀 수 없거니와, 아실의 힘은 겉가죽에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고마운 걸까?
  그럴 지도. 다 늙어서 주책이라는 쑥덕거림을 알면서 아실에게 탐닉하는 까닭을, 아실만은 안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노대 아래의 핏자국을 방치하는 까닭을.
  지우지 않는 게 아니었다.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잊어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자초한 비극일지라도.

  스카리는 이제 없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순간순간 그런 비합리적인 것을 원해버리는 자신이 있다. 그때마다 비웃지만 회한은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찾아와 자신을 지치게 한다. 돌이킨들 달라지지 않을 것을 잘 아는데. 자신이 변하지 않듯이 스카리도 바뀔 리는 없는데. 그런데도 깨닫고 나면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는 자신이 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메마르고 삭막한 발케네의 흙먼지만큼이나 탁하고 피폐해진 가슴이 있다.
  그런 그에게, 아실만은 동정도, 비웃음도 보내지 않는다. 그저 관조하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할 뿐.
  고마운 걸까?
  확실히. 락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날 아이가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락토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락토는 놀라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고쳤다.
  딸이어도 상관은 없지. 단지 그뿐이다.
  락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걸음에만 집중했다.

  파리조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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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토를 딱히 좋아한 건 아닌데, 아실과 같이 있으면 꽤 잘 어울리더군요.
둘의 후일담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심하게 많이 나긴 합니다만;)

하지만 그러려면 전쟁에서 분리주의자들이 이겨야 할 텐데 현 상황으로 봐서는 별로 그럴 것 같지도 않고, 게다가 얼마 전 락토 각하는 아들 손에 존속살해 당하셨으니; 거기다가 전쟁의 승패부분까지 연재가 진행되어버리면 아무래도 못 쓸 것 같아서;; 더 연재가 진행되기 전에 부랴부랴 써봤습니다.
언젠가 라이카 양이 말한 ‘자가발전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장르’란 바로 이런 것이려니;


...근데 이거, 공개란에 올려도 될까? 자체 검열해야 하는 거 아닐까... 으음; 뭐, 이글루는 성인 서비스니까 괜찮겠지.

by 샐리 | 2004/05/04 18:18 | 창작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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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노마의 오두막 at 2004/05/07 12:06

제목 : ...아래 글 보족 : 검열되었던 풀밭씬;
욕구불만인가...;; 야오이도 모자라 이젠 남녀상열지사까지 손대다니;; (...라고 해도 본 게 야오이밖에 없으므로 남녀물도 야오이삘이 되어버렸지만;;) 어차피 저 아래 팬픽의 분량만으로도 이글루의 한 포스트 글자수 꽉 채웠으므로 자세한 풀밭 씬은 필연적으로 검열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글루는 19세 이상 성인들이 이용하는 서비스이므로 이 얼음집 들르는 분들도 성인들이시리라 믿고; 그렇다고 해도 곧 삭제해야겠지만, 기왕 쓴거... 잠시 올립니다. (...야오이도 아니니 도대체 올릴 공간이 달리 없는걸;;)......more

Commented by 肢解 at 2004/05/05 09:33
샐리님 존경합니다 ㅠ_ㅠ;; 눈물나게 웃으며 봤습니다.
Commented by 샐리 at 2004/05/05 13:27
감사합니다, 지해 님. 아까 쓰셨던 덧글도 재미있었는데. '이니디의 후지와라 파파처럼 그냥도 멋지지만 커플링이 되면 킹오브 킹이 되는 락토 님'이라고 하셨던가요. ^^ 이니디를 보다 말았지만 대충 이미지는 상상이 되네요. ^^

실은 이 둘을 보면서 할슈타일&미 커플을 떠올렸습니다. 비슷하지 않나요? 이쪽도 하나하나는 별로인데 둘을 붙여놓으니 의외로 쿵짝이 참 잘 맞는 커플이었죠. 할슈타일이나 락토를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남자고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라고 할때의 여자들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쁜 남자, 하지만 강한 남자랄까.
...그래서 절대로 호모 커플링은 불가능한 남자들;
Commented by Luminary at 2005/08/08 11:24
멋진 글 감사합니다; 눈물나게 재밌네요 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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