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데이(시난)


촌부 - 자승자박

...그리하여 근간 삘받아 읽게 된 판무협 감상글 두번째.


촌부 (지은이) | 청어람(뿔)





소년A네 집에 전해진 비전을 뺏으려고 구대정파가 가문을 멸하고 부모형제를 죽였다.

간신히 살아남은 청년 A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비전을 익혔다. 그래서 실력 좀 붙고 살만해지니까 이번에는 구대문파가 쫓아와서 마누라와 자식을 죽였다.

질기게 살아남은 아저씨 A는 눈에 더더욱 핏발을 세우고 무공을 대성, 급기야 천하제일마의 자리에 오르고 정파에 대적할만한 세력도 키웠다.

수십년 걸려 다 키우고 알아보니 원수라 생각했던 정파들은 단순한 꼭두각시일 뿐이었고, 뒤에 도사린 진짜 원수는 구파일방도 싹쓸어버리고 천하 - 황실마저도 - 를 제패하려는 음모를 획책중.

할아버지A는 고민한다. 구파일방도 원수지만 그냥 냅두면 진짜 원수가 웃게 생겼고, 그 꼴을 막으려면 구파일방을 살려야 하는 개새같은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개새들(;)을 그냥 구해주기엔 피맺힌 원한이 너무 깊어 방해를 했다.

용서할 수 없는 적을 살리기 위해, 할아버지A는 스스로 기억을 지워 원한을 잊기로 한다.

...그러다 너무 잘 지워져 신생아;;가 되어버린-_;;; 할아버지A(환골탈태로 겉껍질은 청년A)의 용서와 구원의 방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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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풀어놓으면 저렇게 되지만, 실제 소설은 마지막 부분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기억 지워 깨끗깨끗이 되어버린 금강불괴 청년A가 백치 상태로 돌아다니다 사람을 만나 조금씩 기억과 무공을 되찾고 과거의 실마리도 풀어가는 방식.

그 앞부분이 상당히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었다. 하룻강아지...아니 하룻범아지(...)가 싹퉁머리없게 만나는 사람마다 뻗대며 파티를 형성해가는 과정은 물론 정석적이지만 적절한 웃음이 버무려져 재미있었고, 그리하여 조금씩 드러나는 과거의 진실이며 그 과정에서 청년A(실은 할아버지A)가 옛 수하를 만나는 부분에서는 정(情)의 깊이를 느끼기도 했다.

문제는, 그게 오래 안 갔다는 것.

대략의 비밀과 음모가 밝혀지고 파티가 할 일도 드러나자, 남은 것은 이제 음모를 분쇄하고 흑막을 쳐부수는 하나로 수렴한다. 그리고 그게 밋밋하다는 게 문제다.

4권부터 끝권인 7권까지, 풀어놓은 떡밥을 확실히 수습해가고 있긴 하지만 그게 독자의 예상에서 거의 벗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에 읽으면서 점점 흥미가 감소해가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로, 전체 7권중 네권이 '뒷수습'인 상황.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관성으로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파티원끼리 주고받는 말장난도 앞부분에서야 재미있었지만 그게 계속 반복되면 식상해서 타성으로 넘기게 된다.

이를테면, 3권까지는 앞길이 안 보이게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가는 재미가 있었다면, 일단 산꼭대기에 오른 후부터 하산하기까지는 아스팔트 직선 8차선 도로 -_;; 서울부터 부산까지 직선 고속도로를 간다고 생각해보라. 졸린다. -_;

중간에 가끔 커브길을 넣어주면 좋지 않았을까? 큰 줄기에 변화를 주기 어렵다면 중간에 파티원끼리 내분이라도 일어나게 하던가, 적 쪽에서도 보스의 방식에 고민하는 배신자B같은 캐릭터라도 만들던가, 마지막에 무림맹주라도 거하게 뒤통수를 좀 쳐주던가, 아니면 3권에 나온 A의 부하라도 재등장시키던가... 예컨대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옛 군주의 위기에 짠 하고 나타난다는 뻔하지만 스펙터클(;)한 감동이라도 느끼게 해주던가....;; 작품이 품고있는 주제의식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무리가 나쁜 것도 아냐. 떡밥 다 회수하고 마무리 깔끔하고 다 좋은데, 밋밋해. 아아 이를 어째 ㅠㅠ

좋았던 부분은 역시, 위에서도 얘기한 복수와 용서를 대하는 주인공의 자세였다. 자신이 당한 피를 피로 갚아주지 않고 그들을 살려주는 대인배적 결단을 내리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기억을 다 가지고는 도저히 그들을 살려줄 수 없어서, 차라리 기억을 다 비워내버리는 쪽을 택하는, 그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라니. 그랬기에 그가 모든 일을 마무리짓고 기억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진정으로 다 잊고 비웠을 때, 봉인해두었던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는 마지막 장면에서, 독자도 그간의 밋밋한 전개를 덮고 잔잔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지 않겠는가 싶다.

문장력이라던가 무협에 대한 지식은 물론, 특히 도가에 대해 조예가 깊어보이는 작가였다. (전문가가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일반 독자가 보기에) 후반부 일직선 플롯-_-;;만 보완한다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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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페리 2009/04/15 20:30 # 답글

    너무잘지워져 신생아..(.....)
    그나저나 전 역시 판무협은 그닥인가봐요 ;ㅅ;
  • 샐리 2009/04/15 20:35 #

    실은 저도 안 읽어요 ^^;; 20세기(...)에 판타지 초창기 때 좀 읽고 그 후로는 한 8년은 안 읽었네요.
    그래도 이번에 좀 몇권 읽었는데, 간만에 읽으니 재밌는 것도 좀 있고 합니다. 물론 꽝도 많지만요;;;
  • 오거 2009/04/15 21:27 # 답글

    '하룻범아지'란 표현에서 빵 터졌습니다 ㅜㅜb
  • nanaase 2009/04/16 00:10 # 삭제 답글

    소년A네 집에 전해진 비전을 뺏으려고 ==> 소년 A의 버진을 뺏으려고로 봤습니다. 이놔, 이눈 어떻게 해야할지....ㅠ.ㅠ...
  • 滿月 2009/04/16 00:11 # 답글

    이분 글을 재미있게 보셨다면 최근에 나온 화공도담도 한 번 보시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정말 따뜻한 글이라서 말이죠.
  • 왕자 2009/04/16 00:35 # 답글

    뒤로 가면 힘들었을텐데...(언니 취향은 몰라도 내취향대로라면)
    무협이든 판타지든 읽기전에 문자라도 보내줘. 의견 줄게.
  • 아룬 2009/04/16 02:41 # 삭제 답글

    소년 A의 버진... 댓글 보고 아침부터 실컷 웃었네요. 어쩜..
  • 바람의자유 2009/04/16 18:02 # 답글

    이 분 소설은 초기작들은 초반은 재밌는데, 후반으로 갈 수록 재미가 많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최근작인 화공도담은 그런게 많이 개선되었는데, 윗분 말대로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Metalic 2009/04/25 22:14 # 삭제 답글

    저도 판무협 무지 좋아합니다. ^^ 특히 현민님 소설 좋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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