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데이(시난)


그 모래는 누가 긁었을까? 생각



아마 박재동씨 시사만평 묶음집에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원전을 찾지 못해 포토샵과 마우스로 그렸다. (퀄리티에 신경쓰지 마시라) 그때 내용은 노사정위원회를 빗대어, 맨 처음에 모래를 가장 많이 왕창 긁어가는 사람이 재계, 중간 사람이 정부, 마지막의 빨간 사람이 노동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어떤 만화보다도 이 만화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이것이 기실 노-사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사 전체에 걸쳐 만연되어 있는 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원인을 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으로 쉽게 판단한다. 원인은 보이지 않고 결과는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0년간 폭력에 시달려 절망에 빠진 아내가 마침내 밧줄을 들고 남편의 목을 졸라 죽였을 때, 그 아내가 지금처럼 그나마 동정을 얻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남편이 이유가 있으니 때렸겠지"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고,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이 정말 좋다.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파편화되어 띄엄띄엄 묻혀있던 작은 목소리도 공감을 얻으면 널리 퍼지기 쉬워졌으니까)

이 그림은 며칠전 다음 아고라에서 "낙태 1위 성형 1위 또 무슨 1위더라 암튼 1위 대한민국, 한국에 멀쩡한 여자는 없는가" 뭐 이따위의 제목이 붙은 글을 보고 그린 것이다. (읽지는 않았다. 제목만으로도 무슨 내용일지 훤하니까)

그렇겠지. 낙태 1위라는 말에 쉽게 여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여자가 애를 낳기 때문이겠지. 정자제공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나 콘돔을 잘 쓰고, 그래서 자기들이 그리 좋아하는 '어린 숫처녀'와 처음으로 관계할 때 얼마나 친절하게 "콘돔을 꼭 쓰고 해야 하는 거야"라고 가르쳐주는지 궁금하다.

봉만대의 첫 장편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서 남자가 콘돔 쓰려고 할 때 여자쪽에서 "이물감이 싫다"고 콘돔을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는 콘돔은 쓰기 싫고 임신은 책임지기 싫은 남성 판타지의 극치가 들어있다. 콘돔 쓰기 싫은데 여자쪽에서 알아서 싫다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면 임신해도 내 책임 아니잖아. 나는 콘돔 쓴다고 했다구 룰루라.

자기들은 그러면서 낙태 1위의 책임은 여자다. 영계와 섹스할 생각에 눈이 벌건 그들이 과연 그 영계에게 얼마나 콘돔 사용법을 가르쳐줄까. 여자들이 콘돔을 쓰고 싶어도 남자들이 싫어하더라라는 통계는 그들에겐 관심밖이다. 애는 여자가 배고 낙태는 여자가 하니까. 그래서 최종 손가락질은 여자가 받는다. 마지막으로 막대를 쓰러뜨린 자가 비난받는다. 늘 그렇다.


농민이 시위한다. 농민이 한국에서 시위한다. 농민이 홍콩에서 시위한다. 시위한다 시위한다 화염병이 난무한다 방패가 춤춘다 거기서 보이는 것은 "농민이 시위한다". 농민이 "왜" 시위했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막대를 쓰러뜨린 자만 비난해도 충분히 먹히는데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 "왜"를 다룰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농민은 시위한다 화물트럭 운전사는 시위한다 지하철노조는 시위한다 시위한다 시위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봐주지도 않으니까. 얌전히 있으면 봐주지도 않으면서 목청을 돋우면 시끄럽다고 비난한다. 사람들에게는 막대가 쓰러진 그것만이 중요하니까. 막대를 쓰러뜨린 사람만이 나쁜 놈이니까. 동성애자는 죄인이다 말 많은 여자는 짜증난다 너희는 조용히해라 조용히 억압받고 심장이 썩어 죽던 굶어죽던 조용히해라 시끄러운 건 질색이다 시위하지 마라 떠들지 마라 말하지 마라 그 자리에서 조용히 입닥치고 죽어라 나는 시끄러운 것이 싫다 막대가 쓰러지는 것만이 싫다 나는 막대를 꽂은 모래산에서 누가 가장 많은 모래를 먼저 긁어갔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지율스님이 목숨을 걸고 조용히 단식하자 이번에는 협박이냐고 외친다. 나를 거슬리게 하지 마라 신경쓰게 하지 마라 나는 나 하나 먹고 살기도 바쁘다 그런 내 뒤에서 누가 웃으며 모래더미를 긁어가든 상관없다 막대만 쓰러뜨리지 마라 조용히 해라 조용히 해라 조용히 해라 조용히 숨어서 혼자

죽어라





...나는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고 시위 현장과 시민 불편과 나라 망신만을 노래하는 기사들을 볼 때마다, 낙태 1위 성형 1위 골빈년들이라고 조롱하는 기사를 볼 때마다,

그 모래는 누가 먼저 긁었는지를 조용히 생각한다.


누가 긁었을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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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전히 모 목사놈 스토킹... 2005/12/24 18:59 #

    여전히 그 목사놈의 글부터 링크.... 홍콩의 과격시위 비판 글에 질문 주신 분께 그리고 여전히 앤드류님의 글 링크.. 말 같지 않은 소리 마시오 깜짝 놀랬잖아 그리고 기타 다른 분들의 글 트랙백.... 약자는 비참해야만 하나? 성탄 전날에도 사람 바보만드는 목사가 있구나 그 모래는 누가 긁었을까? ....지금 매우 기분이 엿같은 관계로 딱히 막말해줄 의욕조차 안난다.... ... more

  • 오죽하면 그러겠어요 2005/12/24 23:24 #

    그 모래는 누가 긁었을까? 11월 초 파리 소요 사태가 한창 뉴스를 탈 무렵이었다. 뉴스에서는 파리 시민 두 명의 인터뷰를 내보내고 있었다. (근 두달 전 일이니 가물가물한 내 기억에 따르면) 안경을 쓴 아프리카계 프랑스인은 "정부가 잘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저항 방법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했다. 아이를 무등 태운 한 백인&n...... more

  • 전 이런글이 좋습니다. 2005/12/25 05:01 #

    그 모래는 누가 긁었을까? &lt;-- 샐리님의 이글루입니다. 꼭 읽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전 저런글이 좋습니다. 어쩌면 그리워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언가에 대해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고, 그에 공감하고 때로는 반박도 하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이런 공간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릅...... more

  • 언니들은 다시 학생이 되었다. 2006/04/28 08:49 #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언니들을 만나게 되었다. 일 년만 같이 지내며 자주 만나지는 못했던 언니들도 있었고 삼 년 동안 같이 공부를 했던 언니들도 있었고 다른 곳으로 간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하는 언니들도 있었다. 적게는 한 살에서 많게는 열 다섯 살까지, 언니들과 나의 나이 차이는 다양했다. 그에 더해 이전에 대학에서 한 공부와 지금의 공부도, 대학을 졸업하고 언니들이 했던 일도, 연애/결혼 관련의 일들도, 다 다양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more

덧글

  • 행인1 2005/12/24 12:47 # 답글

    박제동씨의 생각은 늘 범인의 그것을 뛰어넘는군요. 헤드라인을 보니 홍콩 농민 시위를 접한 경제신문들은 다들 환호성을 지르는 모양입니다.
  • Andrew 2005/12/24 14:00 # 답글

    농민은 국민이 아니거든요, 그들에게는 국민에서 농민은 빠집니다. 국민 밑에 농민 입니다. 대학생도 알바를 해서 갈 수 있는 해외여행이지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농민이 감히 홍콩에 갔다고 '무슨 돈으로 갔느냐'고 힐난합니다.
    농민은 땅만 파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들에는 농민이 아니라 농노로 보이니까요
  • 2005/12/24 15:11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rumic71 2005/12/24 15:55 # 답글

    실제로 저 놀이를 해보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점입니다. 모래가 조금 남으면 아예 안 건드리는 게 상책이다.
  • heres 2005/12/24 16:57 # 삭제 답글

    하~한겨울 동치미 국물같은 글예요 *^^* 감동
  • 比良坂初音 2005/12/24 18:57 # 답글

    안녕하세요^ 앤드류님에게서 링크 타고 왔습니다
    사태(?) 정리용으로 트랙백 해가겠습니다
  • 롤리팝 2005/12/24 20:11 # 답글

    마음이 아프네요~~
  • eggplant 2005/12/24 22:56 # 답글

    전에 논쟁거리가 됐던 수유율 문제와도 통하는 이야기군요. 내막을 봐야 할 때에는 보지 않고, 정작 누가 잘못했는지 분명한 황박사 사건에서는 내막과 음모를 열심히 파해치는 게 요즘 유행인가 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D 트랙백 해 갈께요.
  • 죄다 2005/12/24 22:57 # 답글

    정말 좋은 글입니다. 뭔가 깨닫게 해주시는 글입니다. 정말 감동입니다. 늘 보고 있는데, 간만에 덧글 남깁니다. ^^;
  • 뚜비두 2005/12/25 00:32 # 답글

    깊이 공감합니다.
  • 네코쨩 2005/12/25 04:32 # 답글

    글 보다가 울 뻔했어요^^;
    잘 보고 갑니다^^
  • 네코쨩 2005/12/25 04:35 # 답글

    그리고, 트랙백해갑니다^^
    [링크 거는 방법을 이것밖에 몰라서-ㅅ-;;]
  • 사은 2005/12/26 00:36 # 답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아래에는 보이지 않게 작용한 것이 수없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모저모로 꽉 죄어놓고서는 그만 터져나와 버리는 것들에 대해서 더럽다고 외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낙태 1위, 성형 1위, 라는 부분에 가슴이 좀 아픕니다.
  • 마른미역 2005/12/26 01:07 # 답글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 다카드 2005/12/27 10:22 # 답글

    저도 그래서 인터넷이 좋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샐리 2005/12/27 16:41 # 답글

    행인1님// 지금 생각해보니 조남준씨의 시사SF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치맨가;;) 정확한 원전을 알았으면 좋겠는데...

    Andrew님// 관성의 힘이 그렇게 무서운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 심리가, 가난한 사람이 계속 비참하게 사는 것은 "원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서도 부자나 유명인사, 상류층 사람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판잣집수준으로 굴러떨어지는 것도 아닌데도, 사람들이 더 못견뎌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연보호 운동을 할 때에는 지금 이미 처참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가능한한 아름답고 예쁜 자연을 보여주는 것이 효과가 더 좋다고 합니다.

    한국의 농민은 가난하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신들에게는 당연한 거라도 사치가 되나봅니다.

    annji님// 스트레스 해소가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 맞아요. 알지도 못하면서 손사래치는 사람들 참 짜증나지요.

    rumic71님// 맞습니다. -_-b

    heres님// 감사합니다 ^^*

    比良坂初音님// 예 :)

    롤리팝님// 답답하죠.
  • 샐리 2005/12/27 16:41 # 답글

    eggplant님// 그렇죠. 결국 모든 일에 상통하는 이야기예요.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쉽게 판단하더군요. 정작 자신들이 그런 경우를 당하면 홧병날 거면서 말이죠 =_=;

    아하하,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내막을 볼 필요도 없는 황박사 사건에서는 그토록 음모론이 횡행. :) 결국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일까요. (한숨)

    죄다님// 감사합니다 ^^* 종종 남겨주세요~

    뚜비두님// ^^

    네코쨩님// 와, 감사합니다. ^^* 네코쨩 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D
  • 샐리 2005/12/27 16:42 # 답글

    사은님// "조용한 것" "분란 없는 상태".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한 평화를 정의로운 분란보다 더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요. 사람들은 파업을 하는 노조 사람들이 국민 불편을 야기했다고, 파업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그들의 생존권에는 관심이 없지요. 그 얘기는 결국은 "너희는 우리를 위해서 봉사만 하고 굶어죽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진데,거기까지 생각하려 들지도 않아요. 학교에서는 그런 간단한 기초 논리나 도덕도 안 가르치고 대체 뭘 가르치고 배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쁜 여자를 찾으면서 성형은 조롱하면 어느 장단에 춤추라는 건지. (한숨)

    마른미역님// 감사합니다 ^^

    다카드님// 예, 그래서 인터넷이 좋아요. 인터넷이 없었다면 이 많은 목소리들은 그저 파편화된 소수, 혼자만의 목소리로 지금도 묻혀있었겠지요.
  • 2005/12/28 11:38 # 삭제 답글

    더 슬픈 건 같은 문제에 선 사람들도 막상 당사자가 아닌 이상은 이런 이들에게 손가락질한다는 거죠. 노동자가 노조활동에 돌 던지는 것처럼요... 오늘 아침에 읽은 홍세화씨의 칼럼( http://wnetwork.hani.co.kr/hongsh/452)도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 베지밀비 2005/12/28 15:06 # 답글

    마치 사설시조같이 시원하고 속을 후벼파는 글입니다.
    샐리님 글을 읽으면 제가 다 한풀이라도 한 것 같네요. 이렇게 시원하게 말해주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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