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블리치 팬픽 - 두려움

...뭔가 멋진 소개글을 쓰고 싶었는데 능력 부족이라 끙끙만 대다 싸그리 지워버리고
핵심만 간단히 씁니다.

제가 본 블리치 팬픽 중 제일 멋진 글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본'이라고 해봐야 얼마 안되긴 하지만, 명품이 꼭 비교대상이 있어야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신발 100개 신어보고 그중 가장 발이 덜 아픈 걸 "아 이게 제일 좋은 거구나"라고도 할 수 있지만, 딱 한개를 신어도 발이 너무 편안하다면 다른 건 안 신어봐도 "이 신발은 명품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맥락에서 감히 소개드리고 싶어 퍼왔습니다. 즐거운 독서시간...이라고 하기엔 무거운 이야기입니다만, 그래도 블리치 팬 분들께 좋은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179화에 관한 단편이니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피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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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치 179화를 보고 난 후…. 단 한 화에서 쌈빡하고 아름답게 끝나는 뱤도령의 애달픈 과거를 보고나서 뱤도령 주거버려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를 외치며 영감을 받아 삽시간에 쓴 글… 입니다. 망상은 어차피 자유! 짧게 써냈으니 독자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라는 소리겠져…. -_-+



블리치 패러디 - 두려움

by 후추와양파




0.

뱌쿠야는 고개를 돌려 여화 소년을 쳐다보았다. 몸이 성하지 않았기에 목만을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여화 소년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어쩌며 의식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손끝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여동생이 작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욱 더 크게 뜨고는 연민 가득한 빛을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뱌쿠야는 생각했다.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본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는 눈을 감고는 과거의 실타래를 풀어 기억의 저편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수많은 갈림길 중에서 한참을 헤맨 다음에야 그는 겨우 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상처가 주는 끔찍한 고통의 영향력은 이미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이 그가 인식하고 있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눈을 감자 걱정이 되었는지 여동생의 그의 손을 강하게 잡아왔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뱌쿠야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째서 저 소녀를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는가. 어째서 그 여자가 자신의 길을 바꿔버리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저 두 여자는 도대체 자신을 어디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대답해 줄 수 있는 여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생전에 그랬듯이. 여동생이 작은 소리로 무언가 말을 걸어왔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를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뱌쿠야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기운이 떨어졌기에 여동생의 그것보다 훨씬 약한 힘이었다.



1.

아내가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고 나서 말이 없는 그에게 다가오려 하는 시종은 없었다. 뱌쿠야를 어렸을 적부터 돌봐 온 노인 한 명만이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와, 손이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서고서 조용히 상자를 내밀었다. 쿠치키가에 어울리지 않는 낡고 지저분한 나무 상자였다. 뱌쿠야는 상자를 받아들고서 무언의 위압으로 노인을 멀리 쫓아냈다.

상자 안에는 오래된 서신이 하나 들어 있었다. 뱌쿠야는 그것을 한 번 읽고는 갈가리 찢어버렸다. 하얀 종이 조각이 허공에 뜬 벚꽃처럼 흩날렸다.

아내의 시신은 곧바로 태워져 재로 돌아갔다. 분가의 작은 아버지가 재혼처를 안고서 뱌쿠야를 방문한 것은 아내가 죽은 지 열흘도 안 된 날이었다. 뱌쿠야는 작은 아버지의 입에서 쿠치키가의 당주로서의 덕목과 의무의 목록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오기 전에 정무를 핑계 삼아 자리를 떠났다. 그는 나쁜 남자는 아니었지만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노인네가 흔히 그렇듯, 옹졸하고 참견이 심한 그저 그런 노인네였다.

아내의 여동생을 양녀로 맞이한 것은 아내가 죽은 지 세 달 뒤의 일이었다. 일족들은 모두 반대하였고 그 중에서 작은 아버지의 반대가 가장 격심하였다. 뱌쿠야는 이미 결정된 사항을 반복할 수 없다고 단언했고 이런저런 말이 많던 일족들도 점차로 그의 고집에 손을 들었다.

뱌쿠야와 일족의 대립 가운데에서 가장 지쳤던 것은 아직은 어렸던 소녀였다. 아이는 자신의 존재가 쿠치키가에 있어 벽에 밴 그을음처럼 벽을 통째로 무너뜨리기 전에는 어찌할 수도 없는 보기 싫은 거슬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뱌쿠야라는 벽은 그녀를 쿠치키가에 있게 했지만 마치 벽처럼 차가웠다. 언제나 벽처럼 등을 돌리고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을음은 벽에서 떨어져 나가고 싶어 하고 있었다. 달이 보이지 않던 어느 날 밤, 여동생은 그에게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를 쿠치키가에서 쫓아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다음에 이어진 여동생의 말은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곳이 무섭다, 이곳이 싫다, 당신이 무섭다, 당신이 싫다, 더 이상 당신의 동생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 따위의 진심을 오라버니께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여동생의 상관이고 마음 속의 연인이었던 그 남자가 죽자 여동생은 갈 곳을 잃었고 그것이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고 갈라진 벽에서 떨어진 파편처럼 떠나가리란 결심을 하게 해 주었다는 것을.

그는 여동생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여동생은 쫓아오지 않았다. 뱌쿠야는 달이 뜨지 않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을 그렇게 서 있었다.



2.

그는 요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향락과 사치와 또 그 사이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갈증을 그의 천성이 어느 부분에서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떠밀림 탓에 거의 반 강제적으로 요정을 들렸어도, 그는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홀로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적을 깨고 여자들의 시끄러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요정 전체가 떠들썩해지더니 사내 한 명이 기절한 여인을 안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마 의사일 것이다. 여인의 손목은 대충 찢어낸 하얀 천으로 동여 메여져 있었고 그 천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밤하늘 아래의 하얀 천과 붉은 피, 그리고 여인의 새하얀 피부가 너무나 인상이 강렬했기에 뱌쿠야는 오랫동안 그 장면을 잊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요정의 주인이 와 고개를 숙이고 사죄를 구했다.

요정에서 잡일을 하는 여자 하나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을 안 것은 다음날 아침의 일이었다. 여자는 루콘가에서 데리고 왔다고 한다. 가족도 친구도 아무것도 없이 홀로 떨어진 자들은 그저 데리고 오기만 하면 급료도 없이 평생 동안을 부려먹을 수 있다. 싱거운 식사와 고된 노동과 동료들의 따돌림이 여자를 이미 한 번 겪은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머릿속을 빙빙 표류하던 그것은 물결에 쓸려 나가지 않고 뇌리의 한부분에 깊게 와 박혔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고, 가끔씩 표면으로 떠올라 그를 피곤하게 했다.

여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 것은 다음 번 요정을 방문할 때의 일이었다. 누구의 권유도 없이 스스로 그곳을 들린 것은 그 날 밤의 그 강렬한 붉은색 영상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마음 한구석에서 인정하고 있었다. 여자는 마당을 쓸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천이 감겨져 있었다. 어중간한 죽음의 흔적을 감추려 하고 있었지만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뱌쿠야는 그 손목을 묶은 천을 본 순간 그녀가 그 날의 그 여자임을 알아냈다. 여자는 밝게 웃고 있었고, 자해라 던지 죽음이라 던지 하는 것과는 세상에서 제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문득, 여자가 고개를 돌려 뱌쿠야와 눈을 마주쳤다. 한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런 일에 익숙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지 환하게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빗자루를 움직여 마당의 먼지를 쓸어냈다. 그 뒤로는 다시는 뱌쿠야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여자는 또 자살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밧줄로 목을 매려 했다. 근처에 지나가던 사람이 여자의 신음소리를 듣고 달려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정말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여자의 목에는 검은 멍이 들었고 사람들은 또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그 자리에는 뱌쿠야가 있었다.

“피곤한 아이입니다. 지금까지는 사정이 딱하여 봐 주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루콘가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겠군요.”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눈치 채고 요정의 주인이 흘리듯 말했다. 그것이 미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뱌쿠야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딱한 사정?”

“루콘가의 것들이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했다고 해서, 두 번째 것도 능숙해지리란 법은 없나 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히사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얌전히 기다리기가 무서운 거겠지요.”

주인은 미끼를 물은 고기를 뭍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고개를 비스듬하게 하고 물끄러미 뱌쿠야를 쳐다봤다. 다음 날, 쿠치키가에서는 당주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하인을 맞아들였다.



3.

요정의 주인은 과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걸맞게 영리했다. 그는 냉혈한도 인정머리 없는 악당도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장사꾼이었다. 주인은 죽어가는 여자를 내다 버릴 정도로 양심의 가책에 강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가게에 도움도 되지 않는 쓸모없는 하인을 계속 보듬어 줄 정도로 계산을 못하지도 않았다.

뱌쿠야는 매일같이 마당을 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집에서 살아가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밝은 여자라는 것이다. 루콘가에서 온 병든 여자를 꺼려하던 하인들도 차근차근 그녀에게 익숙해졌고 윗사람들은 이 명랑한 하인을 귀여워했다. 그녀는 뱌쿠야를 어려워하지 않는 몇안되는 하인들 중 하나였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고 대꾸받지 못해도 주눅들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는 점차로 뱌쿠야의 삶 속에서 대수롭지 않은 한 귀퉁이로 자리잡았다. 그녀의 손놀림이 빚어내는 경쾌한 비질만이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뱌쿠야의 귓가로 들려왔다.

그 일상이 박살난 것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마당을 걷고 있던 뱌쿠야는 어딘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그 직후로 피 냄새를 맡았다. 장난감을 부수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자기 오른쪽 손목을 물어뜯고 있는 히사나를 보았을 때, 그는 어느새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자 히사나는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러뜨리면서도, 뱌쿠야를 향해 웃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신의 목소리가 분노에 젖어 있었기에, 뱌쿠야는 놀랐다.

“만약에 주인님께서 정말로 저를 불쌍히 여기셨다면 고통 없는 죽음으로 인도해 주셨어야 했어요. 당신은 죽음을 경험하신 적이 있나요? 남의 죽음 말고 자신의 죽음 말이에요. 그것도 수명이 다해 잠자리 위에서 편히 죽어가는 것이 아닌, 병마에 시달려 온몸이 마비되어가고 칼에 난자당해 죽어가는 그런 상황 말이에요. 그런 죽음은 명예롭지 않죠. 더 고통스럽게 죽어간다고 사후에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지도 않더군요. 난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요.”

뱌쿠야가 멍하니 넉을 빼고 있는 사이 히사나가 손목을 뿌리쳤다. 뱌쿠야는 그녀의 피가 묻은 자기의 왼손에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경련했다. 히사나는 더 이상 팔목을 물어뜯지 않았다. 그녀는 흐르는 피를 옷에다 닦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를 떠나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달조차 뜨지 않은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뱌쿠야는 그날 그녀의 뒤를 쫓아가지도 못했고, 잠자리에 들지도 못했다.



4.

그 다음 날 히사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날이 흘렀다. 그 동안 몇 번이나 달이 없는 밤이 왔다 갔다 했다. 그녀는 그 뒤로는 자살을 기도하지 않았다. 한쪽의 흉터가 양 손목으로 늘어난 것에 대해 집안의 모두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비밀을 함구했다. 히사나가 평온한 얼굴로 비질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녀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찬 시선이 쏟아졌다.

“쿠치키가의 사람들은 다들 참 좋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좋아. 말해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만큼 나쁜 일도 없거든.”

뱌쿠야에게 들으라는 듯이, 비질을 하고 있던 자신과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그밖에 없는 마당에서 히사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뱌쿠야는 발걸음을 멈췄다.

“왜 계속해서 죽으려고 하는 거냐.”

“그건 제가 주인님께 여쭤보고 싶은 겁니다. 태어나면서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째서 다들 죽으려 하지 않는지 저는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태어난 곳에서는 인간이 자살하지 않는 것이 죄처럼 보였어요. 그런 쓸모없는 것들을 위해 곡식과 동물의 고기가 낭비되는 것이야말로 죄악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죽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쓸모가 없어도 남에게 왜 죽으려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거든요.”

뱌쿠야는 입을 다물었다. 히사나는 즐거운 농담이라도 던진 듯 소리 내어 웃더니 뱌쿠야를 쳐다봤다.

“바로 당신, 당신은 내가 본 것 중에서 제일 쓸모없는 사람이야.”

지금까지 차갑게 굳어 있던 뱌쿠야의 머리 한 구석이 소리를 내며 균열을 일으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히사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함을 인정했다. 그는 이제 그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때는 어린 아이처럼 무지하고, 어떤 때는 늙은 포주처럼 음습하다. 살아생전에 명문가의 여식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조신하고 기품 있게 굴더니 어느 순간에 매춘부처럼 천박해진다. 요부 같은 웃음을 얼굴 가득히 담고 있으면서 아이 같은 순수한 목소리로 한 번 드셔보시라고 구운 고구마를 내민다.

“뱌쿠야님은 참 쓸모가 없어요.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지 마세요. 사실은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죠? 당신 자신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당신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 겁니다. 당신은 당주이고 대장이에요. 그리고 쿠치키 뱌쿠야 자신은 아무도 쓸모로 해주지 않죠. 저도 쓸모가 없습니다. 쓸모가 없는 사람은 곧 버려져요. 그래서 나도 내 동생을 버렸어요. 아마 우리보다는 이 고구마가 더 쓸모가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나는 생전에 당신보다 훨씬 더 고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개 귀족 가문의 당주 따위는 쳐다볼 수도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남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런데 그 노력 전부가 죽음과 함께 허사로 돌아갔을 때의 그 기분을 아십니까? 저는 죽음이 끝이란 생각이 있었기에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지요. 끝이 없는 노력은 허무해요. 애써 지은 탑이라도 언젠가는 무너져 내리리란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누구도 두려워서 탑을 짓지 않을 거예요. 탑이 무너져야 다음 탑을 지을 수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은 뱌쿠야를 불편하게 했다. 그는 어째서 자신이 이 자리에 앉아 그녀와 함께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단어 하나하나는 마치 바늘처럼 그의 귀를 파고들어 머리에 난 균열에 와 꽂혔다. 그는 그 후로도 매번 히사나의 곁에 와 고문과도 같은 그녀의 언어를 받아냈다.



5.

그가 그녀를 처음 안았던 밤에도 달이 뜨지 않았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는 히사나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서로의 온기는 더 민감하게 느껴졌고 입김은 귓가를 간지럽게 했다. 뱌쿠야는 그녀를 만나게 된 이후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히사나는 뱌쿠야의 뺨을 정성껏 쓰다듬었고 평소와는 달리 자상한 말만을 반복했다.

“히사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의 전부가 꿈이었는지도 모르죠. 눈을 감지 마세요. 이대로 내 모습을 봐 주세요. 보이지 않더라도 고개를 돌리지 마세요. 당신이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래요. 이제 잊혀지는 건 싫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양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았다. 약하고 가는 팔이었지만 뱌쿠야는 그 안에서 으스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런 불안감 속에서 그는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빨려 들어가 으스러지고, 부서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지도 몰라. 그는 그 속에서 그런 공포를 느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난 후에도 뱌쿠야는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마치 무언가 단단하고 끈적한 것이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의 몸을 맞댄 채로 히사나와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그녀를 만나고 난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단잠이었다.



6.

그의 불안감은 그 후로 더욱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히사나는 이제 예전처럼 그의 곁에 붙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무언가 먹어보라고 내미는 일도 드물어졌다. 그가 다가가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가 그녀를 마음놓고 만날 수 있는 것은 잠자리에서 뿐이었다. 그녀는 약속도 하지 않고 그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아침이 오고 나면 상쾌하다는 표정으로 냉큼 옷을 갈아입고는 방을 나섰다. 그녀가 찾아오는 횟수가 잦아들면 잦아들수록 둘의 대화는 사라졌다. 주변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소문은 쿠치키가의 담을 넘어 거리로까지 퍼졌다. 히사나를 좋아하던 자들은 하나 둘씩 그녀를 멀리했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이에 끼어서 지쳐가는 것은 뱌쿠야였다.

그는 잠자리에 늦게 드는 일이 잦아졌고 점차 피곤해져갔다. 히사나가 언제 올 지 알 수 없으면서도 계속해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언제나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의 방을 찾았다. 이제는 복도를 걷는 도중 누군가에게 들통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말이 없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뱌쿠야는 점점 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없는 미소와 깜빡임 없는 검은 눈동자가 무서워졌다. 머릿속으로 파고들어와 균열을 일으키던 그녀의 독설이 그리워졌다. 어느덧 그녀와 대화를 나누지 않은 지 한 달이 되어가던 때, 뱌쿠야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다그쳤다. 하지만 히사나는 언제나처럼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는 말을 믿지 않아요.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몸을 믿어요, 행동을 믿어요.”

그제야 뱌쿠야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처 없이 표류하던 그들의 불안정한 관계가 어디를 정착지로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물살의 흐름은 그가 아닌 그녀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그것이 미끼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번에도 그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것을 물었다.

다음날, 쿠치키가에서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현 당주 쿠치키 바쿠야가 루콘가에서 데리고 온 시한부 인생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겠다 선언했기 때문이다.



7.

히사나가 말도 없이 집을 나간 것은 삼일 전의 일이었다. 그녀를 아내로 맞겠다는 뱌쿠야의 의지는 결국 쿠치키 일족의 저항을 이기지 못했다. 뱌쿠야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방을 찾아온 히사나에게 최대한 자상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히사나는 이야기를 듣는 도중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뱌쿠야의 말이 끝나고 난 후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뱌쿠야는 그녀가 사라지고 난 후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코가 어느 정도로 오똑한지 순식간에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머릿속의 균열은 금 새 메꿔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꿈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이 없는 밤, 요정에서 손에 메여진 하얀 천을 붉은 피로 물들이며 실려져 나가는 그녀를 본 순간부터 꿈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히사나가 다시 나타난 것은 그가 그녀의 이름마저도 거의 잊어가던 때였다. 그녀는 예의 그 밝고 꾸밈없는 미소를 지으며 숨 쉬는 일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아이를 지우고 왔습니다. 몸조리를 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뱌쿠야님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내 동생이 나에게 그랬듯, 당신에게 하는 일 없이 짐만 되는 여자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뱌쿠야님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제 바램이 아니에요.”

죽으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소리였다. 뱌쿠야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물었던 균열이 굉음을 내며 머리를 산산조각내 부숴뜨렸다. 그녀의 단죄는 성공적이었다. 뱌쿠야는 신의를 저버린 대가를 치렀다.

쿠치키 뱌쿠야는 다음 달, 가문의 하인이었던 여자와 혼례를 올렸다. 목숨을 걸고 반대하던 작은 아버지도 결국은, 한 여자의 안에 갇혀 서서히 으스러져가는 한 남자의 공포를 이기지는 못했다. 루콘가의 히사나는 그렇게 쿠치키 히사나가 되었다.



8.

히사나가 죽어간 오 년 동안은, 뱌쿠야를 가두고 있던 좁은 방이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과정이었다. 히사나의 미소 속에서 생기가 사라질 때마다 뱌쿠야는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새로운 공포가 그를 찾아들었다. 히사나는 잠에서 깨어나면 하나 둘 씩 꿈의 잔상이 잊혀져가듯 그의 곁을 떠나가고 있었다. 히사나가 창가에 기대어 잠을 잘 때마다 뱌쿠야는 심장이 멎어버리는 공포 속에서 그녀를 깨우기 위해 다가갔다. 떨리는 손길에 눈을 뜬 히사나는 걱정할 거 없다는 환한 미소로 뱌쿠야를 바라봤다. 뱌쿠야는 몇 번이나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를 어머니처럼 다독여줬다. 차라리 예전의 공포가 그리웠다. 이미 한 번 그녀를 배신한 벌을 받고 있다고, 뱌쿠야는 그렇게 생각했다.

죽음의 바로 직전, 그녀는 흉터가 맺혀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뱌쿠야에게 말했다.

“동생을 부탁합니다. 그 애를 나 대신 지켜주세요. 나 대신 그 애를 짊어져 주세요. 이미 한 번 히사나라는 짐을 떠맡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부디 이번에도 그렇게 해 주세요.”

그리고 손끝에서부터 그녀의 온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은 날에는 밝은 보름달이 하늘 높이 떠 있었다. 그래서 뱌쿠야는 원치도 않았던 그녀의 죽은 얼굴을 낱낱이 들여다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그것이 히사나의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결국 그에게 전하지 못하고,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삐뚤삐뚤하게 쓴 글씨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낡은 나무상자 안에서 오 년간 잠들어 있던 편지는 이렇게 말했다.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저를 살려주세요, 살아서 동생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 가문보다 규칙보다 저를 더 소중하게 생각해줘요, 한번쯤은 고집을 부려 봐도 괜찮잖아요, 한번쯤은 쓸모있는 뱌쿠야가 되어주세요.

그녀가 죽은 후에 또다시, 뱌쿠야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함을 알았다.



9.

뱌쿠야는 발길을 돌려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는 소녀가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십 오년 전의 자신처럼 폐쇄공포증에 시달리며 상대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소녀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기세였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입을 열어, 그녀에게 대답했다.

Fin.

by 샐리 | 2005/07/12 01:16 | 블리치 - 망상은 표백중♡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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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G-- at 2005/07/12 01:36
훌륭하고 비장하군요. 히사나의 독백은 조금 더 자근하게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글 쓴 사람의 어투가 드러나기도 하구요.)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분위기가 매우 좋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야나기 at 2005/07/12 12:21
휴우~ 가장 뱌쿠야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문제는 이후 루키아를 어떻게 대할지의 문제겠죠. 이렇게 애절한 느낌의 뱌쿠야 오랜만이네요...
Commented by METALICRED at 2005/07/12 16:33
좋네요. >_< 정말 글 기조도 그렇고 캐릭터도 그렇고 정말 잘 살리셨습니다.
역시 역량에 따라 패러디 퀄리티도 천차만별입니다.
저도 블리치 팬픽은 쓰는데. 흑. ㅠㅠ (눈물을 흘리며 땅바닥에 동그라미 그립니다.) 정말 다르네요...;;
Commented by 샐리 at 2005/07/12 23:57
G / 굉장하죠 ^^ 저도 저 독특한, 말씀하셨듯이 '그로테스크학까지 한'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그나저나 글쓴 사람의 어투가 드러난다니, 글쓴분이 짐작가십니까? + + (G님도 아시는 분이죠 ^^)

야나기 / 오호, 이런 정도의 애절한 뱤도령을 또 보신 적이 있으신가보군요. +o+ 암튼 이 글 참 괜찮죠 :)

METALICRED / 괜찮죠? ^^ 오죽하면 통째로 퍼올 생각을 했겠습니까. 후후후.
예, 정말 역량에 따라 퀄리티가 천차만별이라니까요... (← 자학중;) 저도 쓰다가 중간에 포기한 블리치 팬픽이 두갠가 있죠... (먼눈)
Commented by METALICRED at 2005/07/13 00:26
보여달라고 부탁드리면... 구박당할까요? (ㅇ.ㅇ);;
Commented by 샐리 at 2005/07/13 00:49
METALICRED / 예, 구박당하십니다 ^^; 뭐랄까, 팬픽이든 오리지널이든 구상할 때 "이런 장면을 보고 싶어서" 그 장면의 앞뒤를 구상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바로 제가 그런 경우라서요; 앞도 뒤도 없이 클라이맥스만 달랑 써놓고 "아~ 만족" 이런 것이기 때문에 보셔도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Commented by Cain at 2005/07/13 03:17
팬픽은 그 캐릭터들을 잘 모르면 읽기도 어렵던데, 블리치를 잘 모르는 제가 읽어도 참 대단하네요. 제가 캐릭터를 잘 몰라서 놓친 것이 많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_< 블리치 읽고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암튼 고맙습니다. =)
Commented by 샐리 at 2005/07/13 09:58
Cain / 예, 글 정말 잘 쓰셨죠? 필력있는 분을 보면 정말 멋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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